전통 刀劍 만드는 유인채씨

칼밥 20년... 이제 겨우 쇠를 읽습니다.

죽여 없애야 할 것을 죽여. 세상을 바루려 태어난 존재. 하지만 활인(活人)을 위해 살인(殺人)을 해야 하는 모순된 숙명. 거기에다 때론 인간의 더러운 욕심에 의해 자신의 정명(正命)이 헷갈려지는, 그래서 항상 도(道)를 필요로 하는 신세-. 이것이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서 누천년을 버텨온 칼의 생명이요, 역사다.
무릇 칼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 한쪽에만 날이 있는 게 도(刀)요, 양날이 선 것이 검(劍)이다. 목숨을 가르는 방식과 효용에 따른 나눔으로 도는 베기, 검은 찌르기가 특징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 이미 정조 때 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때도 그랬다.
검이 가장 빛나는 곳은 살육(殺戮)이 춤추는 전쟁에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병기다. 충무공의 장검(보물 제 326호)엔 '三尺誓天山河動色一揮掃蕩血染山河(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고 새겨져 있다던가. 자객용이나 호신용이라도 일단 적을 베기 위한 수단이란 점에선 마찬가지다. 하지만 총포에 밀려 오늘날엔 더 이상 병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여전히 살아 있다. 아니, 부활하고 있다. 도검(刀劍)장인들에 의해서다.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내동 '화랑도검'의 유인채(柳寅彩.40)대표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물론 살육용이 아닌 수련용이죠. 실전에서 살아 남으려면 터럭 한 올만치의 실수도 용납이 안되지 않습니까. 검도란 바로 이 원리를 따 몸과 정신을 가다듬고 단련하는 건데 그 최선의 방편으로 진검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검법을 익히는 수련자 못지않게 검을 만드는 우리네도 늘 긴장되고 진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쇠를 다루는 일 치곤 나이가 젊은 편이지만 검에 대해선 조금도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태세다. 말솜씨도 노숙하다. 그가 칼 만드는 일을 시작한 건 1983년. 포천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집안사정으로 취직을 하려던 참에 인척 소개로 구경삼아 서울 중계동에 있던 도검제작소에 들렀던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벽에 예도(禮刀:예식용 칼)가 수없이 걸려 있었는데 잘 빠진 몸매하며 번쩍이는 검광이 얼마나 사람을 홀리던지, 그만 그 길로 칼 만드는 걸 가르쳐 달라고 졸랐죠."
도제식으로 배우는 기술이 다 그렇듯이 두 칸이 될까 말까 한 공장옆에서 먹고 자며 청소와 심부름 등 허드렛일부터 했다. 당시만 해도 수요가 많지 않던 때라 졸곧 예도만 보아 오다 6개월이 지나 처음 진검 제작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 진짜 검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러나 스승은 "아직 턱도 없다"며 아예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방법은 하나. 스승과 선배들이 퇴근(?)한 밤중이나 공일에 나와 어깨너머로 공부를 직접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스승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렇게 일년반쯤이나 지났을까, 참예하고 싶어 껄떡거리는 제자를 스승은 못이기는 체 내버려두었다. 정식으로 공부의 시작이었다. 수없는 담금질과 때림질을 겪은 단조쇳덩이에서 모양을 따고, 두께를 잡은 다음, 선을 살리고, 날을 세우는 과정을 차례차례 익혀나갔다. 어느 하나 쉬운게 없었다. 두께를 잡는 일만 해도 8-9mm짜리 쇳덩이를 손잡이부터 칼끝까지 6-3mm 두께로 고루 흘려 잡아야 하는데 잘못하면 칼이 '개구리 먹기'(두께가 고르지 않아 울렁울렁 한 모양) 십상이고, 칼의 선을 살리기는 지금도 어려운 일 아닌가. 거기에다 칼의 생명이랄 수 있는 날 세우기는 또 어떻고? 칼의 폭(손잡이 쪽 30-32mm, 끝 쪽 22-24mm)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날을 잡아 그 부분만 담금질을 해내야 하는데 적정온도를 넘기면 쇠에 금이 가고, 또 너무 끌어도 쇠가 썩는 법. 하지만 스승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검 하나에 줄잡아 80여 공정을 거치는 데 만드는 사람마다 공정별로 체화된 노하우가 달라 딱히 데이터화 할 수 없습니다. 빛깔.소리 등을 통한 느낌과 손맛으로 빚어낸다고나 할까요. 그게 바로 스승이 제게 베푸신 가르침입니다."
그가 독립해 검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90년 3월. 숱한 파치를 생산해내며 몸으로 익히는 공부를 한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였다. 검도 검이려니와 판매는 영 숙맥이었기 때문이다. 검도장을 찾아다니며 "일단 한번 써봐달라"며 읍소도 하고, 제품에 대한 개선도 해가며 제법 자리를 잡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그 '웬수'같은 IMF란 놈이 멱통을 죄어왔다. 창업 8년 만에 부도가 났다. 하지만 어쩌랴, 배운 짓이라곤 칼 만드는 것뿐인 것을. '죽기조다 싫었던'서너달을 보낸 뒤 동업으로 다시 검을 만들다 재작년 4월부터 홀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즘 그가 만드는 검은 대략 한 달에 30-40자루. 수리 의뢰도 50-60자루 정도가 고작이다. 1백% 주문 생산이라 주문 내용과 재료에 따라 보통 자루당 80만-2백만원까지 받지만 자루당 제작기간이 한달가량 걸려 직원 두명과 함께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다. 이따금 자루당 2천5백만원을 호가하는 사인검(四寅劍)같은 장식용.의전용 검을 만들기도 하지만 '왕 가물에 콩 나기'다. 만드는 데 8개월이 걸리는 사인검은 60년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인년(寅年).인월(寅月).인일(寅日).인시(寅時)에 만든 검으로, 공을 세운 무인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최고의 선물이었다.
"솔직히 말해 돈 생각하면 이 일을 못합니다. 다른 모든 장인이 그렇겠지만 그저 언제나 눈물이 쏙 나올 정도의 명품(名品) 하나 만들어보나 하는 일념에 관성처럼 하는 것뿐입니다."
그는 검을 만드는 순간엔 아무 생각이 없다. 주문자의 요구사항과 신체적 특성에 맞춰 오감을 다해 디자인하느라 누가 귓전에 대고 고함을 지르기 전엔 웬만한 소리는 듣지도(?)않는다. 그래서 간혹 욕도 바가지로 먹고 모처럼의 주문을 날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써본 이는 누구나 만족한다. 정성이 감응된 때문이다. 영화 '청품명월'의 주인공 검객 최민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아직 멀었어요. 이제 겨우 쇠 결을 읽을 정도인데요 뭐. 그래도 누가 '칼 하면 닛폰도'하는 걸 들으면 영 속이 뒤틀려요. 정말 더 공부해서 반드시 때려잡고 말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석자 두치짜리(검신은 두자 세치, 손잡이는 아홉치) 인생'-. 그의 '오기검(傲氣劍)'이 완성되는 날, 고사상은 한껏 푸짐해도 좋을 듯 싶다.
이만훈 사회전문기자 mhlee@joongang.co.kr
중앙일보 2003년 9월 19일